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에는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식들이 상당히 많다. 순례자를 격려하기 위해서인지, 약 올리기 위한 것인지는 그때그때 다르게 느껴지지만. 도로의 표지판이나 가리비가 그려진 비석이 가장 흔하지만, 가끔 벽화도 남은 거리를 알려준다.

이런 벽화에는 대개 지역의 특성이 잘 살아 있다. 유명한 성당 같은 랜드마크나 지역 전설, 특별한 자연환경이나 특산물들이 그려져 있다. 가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기도 한다.
론세스바예스에서 팜플로나 방면으로 3km 남짓 떨어진 부르게테 근방에도 역시나 벽화들을 찾을 수 있다. 이곳 벽화들은 뭔가 힙했다. 토속적인 그림이 아니라 그래피티를 연상케 한다. 다소 빛이 바랬지만, 새하얀 주택들 사이에서는 존재감이 강렬하다.

부르게테 근방에는 새하얀 벽과 빨간 지붕의 건물들이 가득하다. 산토리니처럼 건물 양식을 통일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일종의 타운하우스 느낌인 걸까.
심지어 슈퍼마켓도 비슷한 양식이다. 지도나 앞만 보고 멍하니 걷다가는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간판조차도 조그맣게 쓰여 있다. 그나마 문이 열려 있고 차들이 주차돼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겉으로 보기엔 마치 창고형 매장 같은 모습인데, 흔히 동네에서 찾을 수 있는 중간 규모의 마트다. 파리 이후로 제대로 된 마트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이참에 이것저것 구경해 본다. 약간의 비상식량과 물도 구입할 겸.

스페인의 외식 물가는 한국보다 비싼 편이지만, 식료품 가격은 나쁘지 않았다.

전날 감동받았던 요거트의 실체. 네 개에 1유로인 요거트도 많았고, 한국인에게 친숙한 액티비아도 상당히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확실히 유제품이 저렴한 편이다.


500ml 두 개보다 1L가 훨씬 저렴한 건 어느 나라를 가든지 비슷한 모양이다. `con gas`라고 적힌 탄산수만 피해서 일반 물인 `sin gas` 1.5L짜리를 하나 샀다.
음료수와 약간의 비상식량을 고르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플라스틱 뚜껑으로 덮인 도넛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사장님이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어요. 다음은 북쪽에서 왔냐, 남쪽에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할 차례인가 싶었다.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이 더듬거리며 한국어로 인사하자 깜짝 놀라고는 덩달아 한국어로 인사했다.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계산대 옆에 있는 도넛도 두어 개 구입했다. 나름의 사과 표현이다. 잘못한 건 없지만.
마트에서 파는 도넛으로 점심을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하루에 제대로 된 한 끼는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2일 차의 루트를 계획하면서 눈에 띄는 식당이 한 곳 있었기에 지금까지 식사를 하지 않고 버텼다. 이름부터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Asador Aritza.

아사도르. 남미의 바비큐인 아사도가 연상되는 이 말은 숯불이나 장작불로 고기를 굽는 식당을 의미한다고 한다. 식당 앞에 무수히 쌓인 장작들이 어떤 방식으로 고기를 굽는지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오후 1시 30분부터 영업을 시작해서 다소 일찍 도착하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겠다 싶었지만, 중간중간 사진을 자주 찍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덕분에 이곳에서 식사할 수 있었다.

이 장작들은 직접 손으로 패는 걸까? 그렇다기엔 너무 튼튼하고 두꺼운 장작인 데다가, 장작 패는 소음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1시 25분부터 식당 앞을 서성거렸다. 미리 들어가서 영업하냐고 물을까 했지만,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나 홀로 식당 문을 여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정확히 1시 30분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내 예상과는 달리 조그마한 바가 나왔다. 뒤편이 시끄러운 걸 보니 그쪽에 주방이나 이어지는 식당 구역이 있을 거라고 짐작된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며 주문하려고 했는데 실패다. 결국 직원분과 말을 섞어야 하는가. 바에서 유리컵을 닦고 있던 직원에게 안간힘을 다해 존재를 어필하며, 식사를 하고 싶다고 손짓 발짓으로 표현했다.
직원분은 시크하게 바 안쪽, 그러니까 식당 자리로 안내했다. 보아하니 내가 오늘의 첫 손님인 모양.

전채 메뉴로는 시골식 파테, 샐러드, 숯불에 구운 피순대, 사과주에 익힌 초리소 등이 있었고, 메인으로는 뼈등심 스테이크, 송아지 등심 스테이크, 안심, 돼지 목살, 돼지갈비, 새끼돼지 구이, 문어 등 맛있는 숯불 요리가 가득했다.
너무 궁금한 메뉴들이 많았으나, 나 혼자서 전채+메인 요리를 먹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양도 그렇고 가격 면에서도 그렇고.
결국 가장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 예상되는 송아지 등심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직원은 굽기 정도를 따로 묻지 않았다.

이곳의 메뉴판에는 희한하게도 이런 긴 설명이 있었다. 무슨 설명인고 하니, 대략 이렇다.
- 성체 소고기라고 해서 송아지 고기보다 반드시 질긴 것은 아니다. 충분히 숙성하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아진다.
- 잘 구운 고기가 손님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손님이 고기를 기다려야 한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큰 것은 여러 사람이 나눠 먹는다.
- 700g도 과도하게 큰 양이 아니며, 300g짜리를 요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숯불에 올리기 직전에 고기를 잘라서 정확한 중량을 맞추기 어렵다.
추레톤이라고 하는 소고기 요리에 상당히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다. 아쉽게도 난 혼자라서 주문할 엄두를 못 냈다.

주문을 하고 대충 식당을 둘러본다. 사실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는 게 전부이지만.

유럽의 식당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일반적인가. 만석이면 테이블에서 대화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면 예약이 잡혀 있었던 걸까.

식당 내부가 넓지는 않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서인지 갇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서 추가 주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벨도 없는데 내가 나가서 직접 직원을 찾아야 하나?’라는 망상과 근심에 빠져들 때쯤, 직원분이 주문한 콜라와 스테이크를 가져오셨다.

땀을 잔뜩 흘리고 나서 마시는 콜라는 그야말로 꿀맛이다.
숯불에 굽는 스테이크라 시간이 좀 오래 걸리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금세 서빙되었다.

세상에

너무나 훌륭했다. 족히 400g은 되어 보이는 등심 스테이크. 미디엄 정도로 구워졌고, 겉에는 말돈 소금처럼 두꺼운 소금이 뿌려져 있어서 식감이 즐겁다. 소고기임에도 껍데기 부분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니 부드러웠다. 구워지듯 튀겨진 감자튀김도 짭짤한 스테이크와 너무 잘 어울렸다. 소스나 가니시로 승부 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잘 구운 스테이크가 전부. 그걸로 충분하다.

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라…1년이 지났는데도 이 맛은 잊히지 않는다. 너무 맛있었다.

기본으로 서빙되는 빵은 평범했다. 하지만 고기가 너무 맛있었으니…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아까 그 바에서 계산하면 되는 건가 하며 계산 절차에 대해 다시 한 번 망상과 근심에 빠져들 때 즈음, 직원분이 와서 접시를 정리하면서 디저트를 먹을 거냐고 물어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곤 커피를 주문했다.

디저트에 돈을 더 쓰기는 싫었지만, 이대로 일어나기는 조금 아쉬워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일종의 카페라테 같은 느낌인데, 대중적인 커피 메뉴이기도 하고 저렴하다.

이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와서 지불한 돈은 23.8유로. 한화로 치면 4만 원쯤 되려나.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이 가격이면 아주 훌륭하다. 앞으로의 식사도 이런 퀄리티가 유지되기를 바라본다.

타운하우스 같은 마을을 다시 지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부르게테, 바스크어로는 아우리츠라고 하는 이 마을이 마냥 평범한 마을은 아니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곳이자,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도 등장하는 마을이다. 뜬금없이 헤밍웨이가 등장해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실제로 소란스러운 팜플로나에서 벗어나 이라티강에서 송어를 낚으며 머물렀다고 한다.

그 이름도 그대로인 오스탈 부르게테. 이곳에서 헤밍웨이가 묵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여전히 숙박업소인 모양인데, 일정이 맞는다면 여기서 하루 묵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그 당시에도 이런 풍경이었다면 나라도 머물러서 낚시나 하고 글이나 쓰며 살고 싶다. 너무 평화로웠던, 마치 테마파크 같던 마을.

각 창문에 조그마한 테라스가 딸려 있고 거기에 꽃 화분이 가득한 게 낭만적이다.

조금 걷고 있자니 어떤 식당 근처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스윽 쳐다보니 어떤 음유시인인 것 같은 아저씨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고 있었다. 폼을 보아하니 즉흥적이라기엔 자세나 복장이 예사롭지 않다. 무슨 행사라도 있었던 걸까.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던 마을

인도가 너무 좁은 건 아쉬웠다. 차의 통행이 잦지 않아서 망정이지, 교통체증이 있었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듯싶다.
부르게테에서 벗어나면서 구글 맵만 쳐다보고 걸으면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구글 맵으로 보면 다음 마을까지 직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소 거꾸로 가는 느낌이지만, 표지판을 잘 따라가야 한다. 보이는 대로 직진했다가는 차도만 나와서 결국 돌아와야 한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냐고? 내가 바로 헛걸음했기 때문이다.

잠자코 길만 따라가자. 오늘의 알베르게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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