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의 여행은 쉽지 않다. 자고로 여행이라함은, 고될수도 있고 편할수도 있으나 오로지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인데...부모님과의 여행은 오직 하나. '싸우지 말고 돌아오기'가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부모님과의 여행 10계명이라는게 떠돌겠는가...
역시나 작년에 강릉으로 갔던 부모님과의 여행 또한 쉽지 않았다. 분명 출발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조건 내 말을 듣겠다, 따라만 다니겠다고 하시던 분들께선 강릉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어떤 횡단보도를 건널 것인가로 실랑이를 시작하셨다. 나의 즐거움은 1도 기대하지 않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시작부터 각오를 되새기며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아무튼 그렇게 1박2일이 지나고, 부모님께선 하루 더 머물기로 하셨고 나는 다음날 출근을 위해 먼저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기차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시간 남짓. 부모님과 갈만한 식당이나 카페 등의 후보지를 잔뜩 알아두고, 동선까지 모조리 파악한 나였지만 정작 나혼자 덩그러니 있는 시간에 뭘 할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밤 기차라서 관광지를 갈 수도 없고, 카페에서 부모님과 헤어진 터라 다시 카페로 가기는 애매했다.
그러다 문득, 혹시 기차역 근처에 책방이 하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검색해봤다. 이게 웬걸 강릉 KTX 역에서부터 200m 앞에 작은 책방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책방시리즈 3번째. 강다방 이야기공장
강릉역에서 나와서 바로 보이는 강릉역 육거리 한쪽 모서리에 위치해있다. 낮에는 안보일수도 있지만, 저녁엔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와 눈에 안띌수가 없다.
굿즈 판매에 좀 진심이신 듯 했는데, 역시나 편집샵임을 내세우고 계셨다. 하지만 나에겐 책방이리라.
영업 시간은 특이하게도 금,토,일,월인데, 관광객들을 타겟으로 하시는 느낌이다. 나머지 화수목엔 글쓰기 모임이나 독서모임을 하시는 걸까 싶기도 했다.
짐을 따로 보관할 필요는 없었지만, 기차역 앞이다 보니 짐보관 서비스도 제공하시는 듯 했다. 영업시간이 저녁 7시까지라는 점만 유의한다면, 무거운 짐은 여기다 맡기는 것도 괜찮겠다.
텍스트 위주의 굿즈들이 많았는데, 펜팔 편지라던지, 1년후에 도착하는 편지라던지, 직접 만드신 강릉 가이드북이라던지가 있었다. 곳곳에 '강릉' 이라는 현지의 색깔을 드러내는 책과 굿즈가 많아서 보기 좋았다.
속초에서도 그랬지만, 지역 서점 네트워크가 끈끈하게 구축되어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릴 때 종합서점들이 동네에 있었을땐 서로 경쟁상대로 여겼던 거 같은데, 이런 조그마한 책방들은 서로를 버팀목 삼는 것만 같았다. 뭐 나도 이런 책방 하나로 만족 못하고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하니깐..
이 조그마한 책방의 특징 중 하나가 '강릉'이라는 지역을 강하게 드러낸다면, 또 하나의 특징은 무척이나 식물이 많다는 거였다. 가게 안팎으로곳곳에 화분들이 즐비하고, 심지어..커피나무까지 있었다. 그래서인지 식물이나 자연, 환경에 관한 책들도 많아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읽으려고 했던 책들도 몇 권 있었어서 여기서 사갈까 고민을 많이 했다.
(잘은 기억이 안나는데...가게 밖에도 화분들이 많았고, 모종인지 씨앗인지를 판매?나눔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왜 이걸 사진으로 안남겼는지 너무 후회된다...)
독립서점답게 조그마한 쪽지가 붙어있는 책들이 많았다. 세세하고 솔직한 후기들이 많아서 같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한 켠엔 좀 낡아 보이는 책들도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중고서적. 헌 책들을 따로 매대에 마련하시기도 하고, 책장 중간 중간에 헌책들이 숨어있다고도 하셨다.
이 작은 책방에서 30분 넘게 서성거리며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식물에 관한 책들이 많은 것도, 강릉이라는 지역에 관한 책들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고민 끝에 이번에도 책을 한권 골라서 결제를 부탁드렸다. 그러니까 사장님께서 조심스럽게
사장님: "혹시 작가님이신가요?"
나: "..예? 아뇨 아뇨!"
사장님: "아니면 이런 계통에서 일하시나요?"
나: "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냥 여행와서 책방은 한번씩 꼭 들리고, 한번 들어간 책방에선 책 한권은 꼭 사는 편이라서요"
사장님: "어우. 출판업계를 살려주시는 분이시네요"
30분동안 모든 책과 매대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혼자 중얼거리며 사진찍는 게 많이 신기하셨나보다.
이곳에선 책 한권 사면 소소한 이벤트들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 '문장 뽑기'. 일종의 포춘쿠키처럼 무작위로 쪽지 하나 뽑는 건데, 그 안엔 책에서 발췌한 좋은 문장들이 프린트 되어있다.
그 다음은 '도서와 만남 순간 기록지'
언제 어디서 무슨 책을 샀고,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를 짧게 기록하는 쪽지. 책방에 마련되어있는 의자에 앉아서 적을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선 무슨 책을 샀느냐?
어떤 책을 사야할지 고민하다가 어느 한켠에서 익숙한 매대를 발견했다.
제주도의 소심한 책방이나, 부산의 주책공사에서 표지가 가려져 있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컨셉은 대동소이 했지만, 표지는 가린 채 사장님의 추천사와 책 가격만 보고 구입하는 책인데, 여기서도 그런 컨셉의 책을 팔고 계셨다. 일명 오늘의 책, 이달의 책. 역시나 표지만 가려져있고 날짜와 책의 키워드만 봉투에 적혀져 있었다. 이렇게 책을 사면 자연스레 독서 편식도 피하게 되어 좋다.
남은 '오늘의 책'이 몇권 없었어서,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날인 11월 16일에 세상에 나온 책을 골랐다. 그리고 11월 16일까지 기다리다가 당일에 무슨 책인지 확인해봤다. 이런 두근거림도 좋다.
동심으로 잠깐이나마 돌아갈 수 있던 좋은 책이었다. 얼마전에 이 작가분 신간도 나왔다던데...언젠간 찾아 읽어봐야지.
기차역에 가까워서 접근성이 너무나도 좋다!!! 짐도 맡길 수 있으니 강릉 놀러가면 한 번 들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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