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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BOOK] 아티스트 웨이 - 예술가를 위한 재활치료서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요?
라는 질문을 종종 받지 않아요? 취미가 독서라고(아니면 취미를 삼고자 한다고) 수줍게 고백하고 나면,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렇게 묻곤 하더라구요. 전 보통 장르를 안 가리긴 해요. 몇 번 이야기 했듯이, 자기계발서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요. 최근에는 제목이나 표제 디자인을 보고 책을 집는 편이었어요. 뭐 내용은 잘 모르겠고, 끌리는 책을 사야지! 하면서요
 
봄이 저물어가는 작년 6월에 혼자 제주도에 갔었어요. 접이식 미니벨로를 가지고 제주도를 일주하는 계획이었죠. 아실 지 모르겠지만 보통 짧게는 1박2일, 2박3일정도로 한바퀴 돌거든요. 전 자전거 여행이라기보단, 자전거도 타는 여행을 표방하고 천천히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냈어요.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서귀포에서 전시도 보고, 한적한 곳에 있는 작은 책방들도 구경하면서 말이에요.

한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아니, 발견했다고 하는 게 맞나...? 암튼 뭐. 사장님의 취향대로 진열해 놓은 책들이 잔뜩 있었는데요. 그중에서 독특한 섹션은 바로 숨겨둔 책 이었어요. 책을 종이로 한번 더 포장해서 표지조차 보이지 않고, 책 이름도 당연히 써 붙이지 않구요. 책을 추천하는 이유와 그 책을 가져갈 사람에게 보내는 자그마한 편지만 써있었죠. 몇몇 진열대엔 품절이라는 라벨까지 달려있었으니, 한정판 랜덤박스 느낌도 들더라구요! 고심끝에 11번 책을 골랐어요. 이 책은 어떤 책일까? 마치 복권을 긁을 때 처럼 신나더라고요

아이디어가 반짝하고, 매일 에너지가 넘치는 때가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고 또 내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즐겁고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었는데
모두 틀린 것 것 같아... 라는 생각이 잦은 요즘입니다.

그렇다고 나를 포기해 버릴 수는 없어요.
잠시 나의 반짝임이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뿐.
다시 에너지 넘치던 때의 나로 돌아가야 하요.

너무 오래 방치된 상태라면. 그래서 돌아갈 방법조차
가능하기가 어렵다면 이 책을 펼쳐 드세요.

금요일 밤이 아까워 밤을 세워가며 무언가를 해냈던.
라디오를 듣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마음이 가득 있던 그날 들을 상기하며 친절한 미션들을 수행해 봐요.

과거의 나를 구원하고,
현재의 나를 사랑하며
미래의 나를 끌고갈 나는 - 지금 이 앞에 당신.

 
전 아이디어가 넘치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긴 한데 말이죠, 그땐 왠지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매일을 반복하며 자칫하면 관성에 젖고 마는 직장인이라서 그랬을까요? 반짝 반짝 거리며 에너지 넘치던 때의 모습이 있었는 지 조차 잘 모르겠는데, 이 책을 집어들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호기롭게 이 책을 구입해서 인증샷을 남긴 후 집에 와서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어봤죠. 그런데 웬걸 자기계발서인거에요! 제가 말했잖아요 자기계발서만 아니면 잘 읽는다니까요? 심지어 예술가를 위한 내용인 데다가, 매주 미션을 수행해야하고, 궁극적으론 창조성(창의성이 더 익숙한 표현인거 같긴한데, 아무튼.)을 회복하는게 목표라니?
 
저는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크지 않아요. 심지어 창조성(Creative)이라니, 흔하디 흔한 생계형 백엔드 개발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닌가요? (아 그런데 혹시나해서 Creative Developer라고 구글에 검색해보니 꽤나 많은 글들이 있더라고요?! 예술적으로 UI와 UX를 구상하는 웹 프론트엔드 개발자의 지향점인거 같긴 했어요. 아무튼.)
 
책을 덮었어요.
 
그리고 반년이 지났습니다.
 
새해 버프가 충만한 상태일때, 책장에 꽂힌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훑어보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묵힌 숙제 하나 해결하자는 기분으로 그래, 아직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 읽어보자 라고 마음먹었죠.
 
이 책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잊어버린 창조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안내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일종의 재활치료를 해주는 셈이죠. 12주동안 한 챕터씩 읽고 미션을 수행하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어떻게 보면 집단 상담 프로그램 가이드 같은 느낌도 들더라구요.
이 과정에서 제시하는 실재적인 방법은 딱 두 가지에요.
매일 아침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런 방해 없이 (심지어 현타가 오는 내 자신까지도 무시하면서!) 세 페이지 분량의 글을 쓰는 모닝 페이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감성을 충전하고 예술적 감각을 되살리는 아티스트 데이트. 
 
자기계발서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후기로 증명된다고 생각해요. 책에 대한 단편적인 후기뿐 아니라, 가령 이 책을 읽고 창조성을 회복한 사람들의 후기까지 말이에요.
일단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이 주제로 저자는 기업 강연도 나가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독자들이 자진해서 아티스트 웨이 워크숍까지 열더라구요. 심지어 전 이 책을 처음 들었는데, 이걸 읽는다고 하니까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어? 그럼 매일 모닝페이지 쓰세요? 아니 이걸 어떻게 알고있어
 
처음 책의 포장을 풀었을 때와는 달리 더 이상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더라구요. 저자는 계속해서 창조주의 힘을 빌려서 창조성을 회복하라 고 말하고 있어요.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선물로 받은 창조성을 과감하게 드러내라는 거죠. 특정 종교를 드러내거나 지지하지 않는 다면서도, 너무나도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요? 

창조하려는 의지는 인간이 물려받은 유전자이자 잠재력이다.
창조는 언제나 신념의 행위이며, 이 신념은 영혼의 산물이다.

 
굳이 예술가에 한정지은 책으로 봐야할까 싶었어요. 우리 안의 예술성과 창조성이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애써 무시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잖아요? 글이나 음악, 미술 등의 예술 영역뿐만 아니더라도, 일상이나 업무. 심지어 개발의 영역에서도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고, 재능이 없다고 미뤄두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저자의 말에도 용기를 얻었어요. 사실 이 글을 쓰던 와중에 임시 저장이 안되서 처음부터 다시 쓰는 설움의 순간이 있었거든요. 휴. 이 또한 과정이다. 너무 완벽하게 쓰지말자라며 자기긍정을 되뇌이게 되더라구요.
 
아침 출근길에 당장 찾아봐야할 무언가가 없으면, 스마트폰에 모닝페이지를 적고 있어요. 매일 쓰지도 못하고, 일기인지 넋두리인지 의구심이 들면서 이게 제대로 하는건가 싶은 현타가 찾아오긴 하지만, 생각이 정리가 되기도 하고 글 쓰는 습관도 들이고 좋더라구요. 이렇게 글을 쓰는게 덜 어색해지는 장점도 있구요. 아티스트 데이트가 어떤 건지 정확힌 모르겠어요. 그저 관성에 젖어서 매일을 반복하지 말자 정도로 이해해서 살아보려 해요. 항상 깨어있으면서 건강한 자극을 찾아 사는거죠.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승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책방 사장님은 제가 이 책을 고르실 줄 모르고 매대에 두셨겠지만, 다음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몇 명 생각해뒀어요. 저보다 잘 읽고, 잘 쓸 수 있는 친구들일거라 믿어요. 부담주는 건 아니지만요:)
 
참, 이 책방이 어딘지 말하는 걸 깜빡했네요.
제주도 종달리에 있는 소심한 책방이에요! 책방도 많고 조용한 동네인 것 같던데, 다음엔 여기에서만 쭉 지내보고 싶더라구요.
 
 

 
 
 


예술가를 위한 재활치료서를 읽다보니 최근에 많이 회자되었던 책이 생각났어요.
마침 밀리의 서재에도 있길래 후딱 읽어볼 생각이에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10점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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